la dolce video – nytimes

자본주의, 신자유주의에 따르자면 사업은 키워야 하고, 커야 산다. 먹고 먹히는 육식정글, 프렌차이즈가 유행 아니던가. 외식업, 유통업, 교육 등등. 거대하고 화려한 마트에 구멍가게는 버틸 수 없다.

그러나 다수의 선택이 모든 사람을 행복하게 할 수는 없다. 다수결을 민주주의의 기본이라 믿는 이들도 있지만, 그들은 대세와 일치하는 코드를 타고난 행운아일지도 모른다.

크지 않고 변하지 않고 생존할 수는 없을까? 다양한 색깔이 자리를 찾는 뉴욕에서도 쉽지 않은 모양이다. 아니면 없는 곳 없는 인터넷의 물결을 원망하랴. NYT에 난 소피아 홀랜더의 기사, 김氏네 달콤한 비디오 이야기가 흥미롭다.

La Dolce Video – NYTimes.com

건장한 한국 이민 김용만氏가 뉴욕 이스트 빌리지에 비디오 대여점을 연 것이 1987년, 다양한 8000여 영화가 있었다. 독특한 영화에 돌아선 이도 있었지만 모험심 넘치는 단골들이 늘어 다른 곳에서 찾을 수 없는 영화들로 55000개로 늘었다. 인터넷의 강자 넷플릭스 Netflix가 등장하기 전까지.

90년대 전성기 20만 명을 넘던 고객이 작년 말에는 고작 1500여 명이 단골로 남았다. 컬트 팬들이 있었으나 대부분 추억을 간직하고 떠나간 것이다. 지난 9월 그는 공개 도전장을 냈다. “지난 20년 간 김氏네를 성원한 고객들에게 소장영화를 열어줄 후원자를 구합니다.” 세가지 조건이 있었다. 소장품을 유지하고, 추가하고, 회원 및 대중에게 개방할 것. 많은 신청에도 불구하고 조건을 만족하는 것은 없었다. 단 하나를 제하고서.

같은 달 42세 이태리 그래픽 디자이너 프랑카 파울리는 이태리 신문 라 레퍼블리카에서 한 기사를 발견했다.

기원전 4세기 경 세워져 가리발디가 독립전쟁의 기치를 들었던 도시, 시실리 서부의 살레미 시의 독특한 재건계획. 1968년 지진으로 유적들을 잃고 잊혀졌던 도시를 되살리려는 노력에 저명한 예술가와 지식인들이 함께 했다는 내용이었다. 베네통 광고로 유명한 사진작가 올리비에로 토스카니가 참여했다. 그녀가 함께 일한 적이 있던 토스카니는 이제 “매일 소비할 수 있는 일상의 문화”를 추구하는 예술재단 클리오의 회장을 맡았다. 예술인들의 정치적 활동에 매료된 그녀는 사진작가인 남편과 함께 살레미를 방문했다.

그리스, 로마, 노르만, 아랍 등 수 세기에 걸친 다양한 건축양식은 놀라웠지만 쇠락해 있었다. 때맞춰 발표된 시의 재건 계획은 역사적 건축물을 2년 안에 복구하는 조건으로 단돈 1유로에 팔겠다고 했다. 파울리는 뭔가 제안하리라 마음을 먹었다.

그녀는 친구를 통해 아는 사회학 대학원생 글렌 하이먼을 만난다. 중국에서 빵만드는 법을, 스웨덴에서 항해술, 프랑스에서 영어를 배운 31세의 박사과정 학자, 친구네 집을 전전하던 그는 공교롭게도 김氏네 팬이었다. 뉴욕대 영화과 친구를 통해 “영화 천국”을 알게 된 것.

폐점 소식을 이제 영화를 만드는 그 친구에게 전했다. 친구는 울분 – 그러게 배달도 하고 연체료는 없앨 것이지 – 과 자책 – 내가 김氏네를 죽였어, 넷플릭스를 하는게 아닌데 – 을 쏟아냈다. 하이먼도 슬펐으나 일상다반사, 뉴욕과 같은 도시에서는 드물지 않은 또 하나의 별난 이별로 여겼다.

대체 누가 인수할까 궁금했으나 고민하지 않았던 그가 저녁식사에서 이야기를 꺼냈다. 비디오 가게의 소장품들을 듣던 파울리는 놀라움에 귀를 기울였다. “처음 생각은 ‘이야, 살레미 시에 제안해볼까’였어요. 그러나 농담같은 생각이었죠. 실현될거라고는 상상하지 않았습니다.”

단념하지 못한 그녀는 이태리는 어떨지 김氏에게 메일을 띄운다. 진지한 제안이라면 고려하겠다는 그의 회답에 그녀는 전화를 시작했다.

“그러지 않으려 애썼지만 사랑에 빠지는 것 같은 일이었죠. ‘누군가 뉴욕에서 영화들을 인수하겠지’라며 조심스러우면서도 이 놀라운 소장품을 이해할 곳은 다시 짓는 살레미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습니다.”

소문을 전해들은 고객 가운데는 충격을 받고 김氏에게 따지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도 노력했지만 그만한 제안은 없었다. 뉴욕 시내의 30개 제안들은 조건에 다 맞지 않았다. 차츰 살레미와 파울리의 열정에 마음이 움직였다.

살레미 창의국장 토스카니는 적극적이었다. “이 소장품을 인수할 수 있으리라는 전망에 웅대한 계획, 대모험이 될거라 생각했습니다. 영화가 멋진 곳에 둥지를 틀테니 뉴욕사람들 화낼 필요 없지요. 살레미의 경관은 아주 특별하고 뉴욕보다 훨씬 좋습니다. 살레미는 미래요, 뉴욕은 과거입니다. 그래서 김氏네 영화가 이 곳으로 오는겁니다.”

진행 중인 계획 가운데 네버엔딩 축제는 24시간 동안 10개 영화를 상영한다. 베니스 비엔날레와 협조하고 팔레르모 대학과 번역전문 업체의 조력으로 자막 추가, 인터넷으로 찾을 수 있는 데이터베이스 구축, 보관을 위한 DVD 이전도 계획되어 있다. 그외 상영관과 방문객 투숙공간을 17세기 예수회 대학 건물에 함께 완비한다고 한다.

예산과 계획은 아직도 진행중인 문제다. 김氏네 회원들의과 함께.

1월 17일, 김氏네는 음반, 비디오 테입, DVD를 살 마지막 기회를 놓치지 않으려는 고객들로 붐볐다. 젊은 영화학생, 중년이 가까운 예술인, 검은옷을 입은 창백한 남자, 멋쟁이 모자를 쓴 여자. 입구의 검색대에도 가격표가 붙었다. 영화를 만드는 38세의 교사 에릭 호퍼는 서글프게 그 광경을 지켜보았다.

“이 도시에서 아무도 자리를 찾아줄 수 없다는게 놀라워요. 이제 어디서 영화를 빌려볼지 모르겠군요. 한 시대의 종말이예요.”

김氏네 정리체계에 따라 포장된 영화들이 오늘 이태리로 떠난다. 2월 26일이면 팔레르모에 닿고, 며칠 후 살레미에 도착한다. 예전과 똑같은 부대를 만드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스트 빌리지가 아니니 복제를 시도하지 않습니다. 새로운 문을 여는거예요. 뉴욕, 미국, 어디에 있든 회원들과 함께 하고 싶습니다.”

김氏는 그대로 아직도 성난 고객의 불평을 듣는다.

“충격적입니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가게를 찾았다면 한 동안 유지했을거예요. 꽤 괜찮았을겁니다. 문을 닫고 나니 이렇게 나타나네요. 아이러니죠.”

그는 미국에 자신의 족적을 남길 수 있었던 일, 사랑했던 일의 끝을 애도했다. 영화를 잃은 이상으로.

“내 포부는 영화에 대한 사랑을 미국의 새 동네에 소개하는 것이었습니다. 인터넷의 신기술 탓에 더 이상 환영받지 않는 꿈이죠. 비디오 대여업은 미래가 없어요. 뒤늦게 깨달았죠.”

그러나 그의 소장품들은 3000 마일 너머에서 미래를 찾았다. “내 영화를 갖고 좋은 프로그램을 만들거라고 의심하지 않아요.”

이스트 빌리지 고객들에게는, “언젠가 이해하기 바랍니다.”

5 thoughts on “la dolce video – nytimes

  1. 여기는 요며칠동안 봄날씨네. 훈훈한 바람까지 불고..
    겨울에는 Behaviour를 많이 들었는데,

    별탈없이 잘 지내시오. 가끔은 댄스도 좋잖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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