앤 레키의 팬터지 소설 까마귀 탑 The Raven Tower. SF작가의 첫 팬터지는 그럴싸하게 시작한다. 벌을 받을 것이다 There will be a reckoning. 뭔가가 있을것 같이 분위기를 잡고, 지도도 앞에 실려있다.
수백년 동안 까마귀신의 가호로 이어져온 이라덴 Iraden 왕국. 신을 대변하는 까마귀신의 임차인 Raven’s Lease이 저명한 귀족으로 구성된 관리위원회와 함께 통치해왔다. 까마귀신 Raven의 목소리를 내는 까마귀 Instrument와 임차인은 운명을 같이해서, 그와 함께 통치를 시작하고 그가 죽으면 목숨을 바쳐야만 한다. 남쪽 국경을 지키던 후계자 마왓이 서둘러 수도로 돌아온 것은 그 까마귀에 이어 세상을 떠날 아버지의 뒤를 잇기 위해서이다.
봉건제와 중세스러운 설정, 마법과 왕국들이 나오는 세계는 팬터지의 구성요소. 이성과 논리, 과학보다 전통과 의무, 불문율이 지배하는 이라덴은 딱히 이상하지 않다.
그러나 앤 레키는 사소한~ 제목의 라드츠 3부작으로 휴고, 네뷸러, 클락상을 휩쓴 작가. 편안하고 만만한 팬터지를 쓰지는 않았다.
그렇다, 그들은 내가 멍멍이인 것 처럼 언제나 칭송하며 대접하고 관심을 주어 훈련시켰다. 그러나 나 역시 그들을 훈련시켰다. 그들은 내가 우유나 피, 물까지도 받지만, 가까운 강에서 잡은 물고기나 이제 먼 곳이 된 바다에서 가져온 조개를 더 좋아한다는 것을 금세 깨우쳤다. 말하기는 내게 간단한 문제가 아니었으므로, 세대가 지나면서 말을 한 조 만들게 되었다. 나무조각을 물고기 모양으로 깎고 조개껍질을 각각 다른 모양으로 넣고 다듬은 말. 나와 말하고 싶은 사람은 나를 부르고 나서 그런 말이 든 상자에 손을 넣으면 되었다. 맞는 말을 손에 넣어주는 것은 내게 간단한 일이었다. 땅에 말을 줄지어 내 뜻을 알리는 것도 가능했다.
전지적 시점은 흔하지만, 종교적인 소설이 아니면 서술자가 신인 경우는 드물지 않을까. 절대적 존재의 신이란 아무래도 그 신을 믿는 종교 안에서 통하는 개념. 차분하고 냉정하게 사고하는 서술자는 이언 M.뱅크스의 컬처도 떠오르지만 역시 레키의 라드츠 삼부작의 인공지능이 가깝다. 장르에서의 신, 종교, 마법과 계약, 한계와 책임에 대한 흥미로운 시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