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울아, 페이스북 거울아 – nytimes

예년보다 쌀쌀한 날씨에 햇살은 더 반갑다. 문을 열고 나가는 것은 배가 고파서 만은 아니다. 화창한 날씨에 즐거워하는 것은 꼬맹이들과 개들 만은 아니니까.

open door

햇살 아래 걷고 보다 흥미로운 글을 읽었다. 허핑튼 포스트에서도 활동하는 에이미 리 볼의 기사를 옮겨본다.

Cultural Studies – Facebook Bios – Truth or Fiction? – NYTimes.com

자기소개서를 쓰는 경우란? 입시지원서, 데이트 서비스, 이력서 그리고 페이스북이 있다.

페이스북 초보의 프로필에는 기본 정보란이 있다. 재치와 지혜, 용기나 수줍음, 개인적인 동기나 직업적인 성의를 선보일 기회다. 관심사와 인용문처럼 기본적으로 추천된 항목이 있지만, 약력이라고 붙은 곳이 문제다. 객관식 아닌 주관식, 논술처럼 텅 빈 칸.

“자신을 종합하고 개성을 전하는 일은 힘들어요.” “행복 프로젝트 The Happiness Project”의 저자이자 전직 변호사인 그레첸 루빈은 삐딱선을 택했다: 빨강머리, 왼손잡이, 법적맹인, 다이어트 콜라 왕 소비자.

“깊지 않을 바에야 표피적으로 가는 것도 괜찮다고 생각했지요. 끊임없이 머리카락을 비트는 이야기는 않았지만, 내게 있어 특징이 될 것들을 썼습니다.”

페이스북 약력은 실리콘 밸리 사업가 아담 리프킨에게는 설명 반 자아 탐구 반이다.

“동종 업계에는 꽤 냉소적인 사람들이 많습니다. 진심과 열린 마음을 전하고 싶었지요. 너무 깊게 생각하지 않으면, 재미있습니다.”

그래서 그의 진실한 소고에는: 경쟁에서 치사한 술수는 쓰지 않는다. 그러나 사진에는: 판다곰과 유사하다면 순전히 우연입니다.

자기소개에서 가장 까다로운 것은 정치적 성향과 종교관일 것이다. 수수한 민주당원과 공화당원들은 부적절(빨갱이 진보 공산당), 전도(환경보호 국수주의), 대놓고 말하기(당신 왼편) 등으로 넘어간다.

캘리포니아 산타모니카에 사는 데이빗 흄 케널리는 포드 대통령 때 백악관 사진사였지만, 치켜뜬 눈썹당 The Arched Eyebrow Party 소속이라 밝혔다.

“정치적인 사람으로 보이고 싶지는 않습니다만, 세상을 보는 회의적인 시각을 반영해요. 포드 대통령이 공화당이건 민주당이건 내게는 무관했습니다. 더 중요한 것은 그에게도 그랬다는겁니다. 어느날 집무실에서 그가 말했습니다. ‘당신이 공화당원인지 묻지 않았군.’ 그리고 덧붙이더군요. ‘대답하지 마시오.'”

종교는 자아 표현의 빈 캔버스로 통한다: 시적인 사람(요가, 바다, 성당), 수수께끼(머리위, 넓음), 창의적인 사람(니키의 요가 클래스는 종교적인 경험이다), 죄지은 사람(성탄절 천주교인이 되다니 부끄럽다), 무미건조(사생활), 귀여운 사람(무신론자이지만 새끼고양이는 예외), 자신을 묘사하거나 차별화하려 애쓰는 사람(무신론자이지만 종교적 휴일은 O.K.).

주류종교에는 이맘, 랍비, 목사, 신부들도 알아보지 못하는 종파와 분파가 있게 마련이다: 유대교는 아미쉬 유대교, 유대적 이교도, 얼음을 넣은 유대적 다신교, 유대-교(유대교와는 다른듯).

상담 컬럼니스트 E. 진 캐럴은 고전적인 페이스북 난제에 봉착했다: 진실이냐 흥미냐. 정치(에콰도르 급진 자유당)와 종교(신을 포기하고 오프라를 숭배하는 중) 양쪽에서 삐딱한 불신을 전하며 둘 다 성취했다.

캐럴은 페이스북이 대중을 위한 언론중개인이 된 일을 안타까와 했다. “뉴스피드”는 노골적인 자기홍보나 배우자홍보 도구가 되어버렸다.

“우리 모두 자아도취에 빠져있어요. 자신을 너무 사랑하고, 팔고, 팔고 또 팔죠. 모든 것이 오프라 순간으로 바뀌어요. 그게 제 논지입니다.”

동캐롤라이나 대학에서 미술학 석사 학위를 최근에 받은 애쉴리 피어스에 의하면, 친구는 최상의 거울이 된다. 그래서 친구들이 자주 하는 이야기 두가지를 연결지었다: 내 차 안은 언제나 청결하고 나는 모든 것을 그려 목록으로 만든다.

“그림은 꿈처럼 무의식의 반영이예요. 지금 막 작은 라스베리를 그렸는데, 왜 그랬는지 모르겠군요.”

나는 펼쳐진 책이라는 말은 아프리카의 미혼모들에 관심을 갖는 뉴욕 비영리단체 이주계획의 홍보책임자인 스튜어트 트랙티의 철학적 선언이다.

“어떤 애정관계에서든, 타인의 단점을 다룰때 장애물에 부닥칩니다. 그런 것이 있다고 인정하면 안되나요? 가장 깊고 어두운 비밀들이야 말로 나라는 사람을 만드는겁니다.”

시저 카스티요가 휴스턴에서 남부 캘리포니아로 이사했을때 처음 산 것은 중고 서프보드였고 그는 웨이터 일을 했다. 非호지킨 임파종이라는 이야기를 듣고 그는 서핑을 포기해야 했다. 재발하지 않은지 4년째, 제작 조수로 일하는 그는 바다로 돌아왔다.

“건강을 되찾자 서핑을 다시 할 수 있게 되어 행복했습니다.” 카스티요의 프로파일은 열광적이다: 나는 파도를 탄다, 고로 존재한다.

자기규정은 자기만족으로 이어지기 쉽고, 자기아첨은 그 다음 역이다. 그렇게 드러나는 것은 모르는 사이 진실에 근접하기 쉽다. 스펙트럼의 한 끝에는 하바드에 갔다는 사실을 넘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의 프로파일은 “행복한 소수”라는 말 만 않는다.

다른 끝에 뉴저지 쥬니어 라크로스 리그 회장 겸 금융 고문인 짐 도노반의 멜 브룩스풍 참한 자조가 있다: 나는 턱시도 가게에서 흰 양말 신고 있는 사람. “한 아버지가 인정하는거죠: 아는게 없어요”.

자신을 정의하는 것은 꿈에 대한 것이기도 하다고 뉴욕의 제임스 비어드 재단 부회장 미첼 데이비스는 말한다.

“이태리에서 많은 시간을 보냈어요. 거기서는 좋은 인상이 무척 중요합니다. 그렇지만 남들이 생각하는 당신과 자신이 생각하는 사람은 다르지요. 그 중간 어딘가에 당신이 있습니다.” 그는 간결하게 잘 먹지만 너무 먹어요를 골랐다.

“공적인 정보와 사적인 정보의 구별이 있던 세대의 사람입니다. 농장에서 키운 채소와 곡물을 잘 먹고도 비만이 될 수 있다는 산 증거이기도 하지요.”

앨리슨 루리의 소설 속 인물들은 “이성적으로 자기기만”한다고 한 평론가는 지적했다. 페이스북 친구들의 프로필을 둘러본 스티븐 해프트가 공감하는 구절이다.

“개성있는 글귀가 없어서 프로필 샘이 났습니다.” A.C.L.U.변호사이자 영화제작자(“죽은 시인의 사회”)였던 그는 사적이고 직업적인 여정을 담고 싶었다, 그래서: 독립적. 믿을만 한 사람. 틀을 벗어나기. 재미있게.

“어른의 제3장에 적당합니다.”

플로리다 탐파의 기금 전문가 린다 딜츠 베크먼에게 페이스북은 회고록의 축소판이 되었다: 존 버치 오렌지 카운티 가운데에서, 도나 리드 시대 예술을 알고 사고가 자유로운 남부 어머니 밑에서 자랐다. 목가적인 유년시절을 견디고 …

그녀의 약력은 독특함을 인정하지만 논쟁을 청하지는 않는다. “혐오하는 정치관을 가진 사람도 존경해요. 그러나 모르고 넘어가고 싶습니다. 토크쇼 라디오처럼, 내 삶에 없어도 되는 것이지요.”

페이스북의 자화상은 천박하고, 심오하고, 내성적이며 향수를 부르기도 한다. 뉴욕에서 브라이언을 빼내도 좋다 … 는 예기치 못하게 샌프란시스코로 옮긴 컨설턴트 브라이언 지스크를 소개한다.

“나는 뉴욕을 잔뜩 갖고 다녀요. 나 자신의 핵심을 표현하는 방식이죠. 사람들을 평가하는 실마리가 온라인에서는 전혀 다릅니다. 실제로 누군가를 만난다면, 게으름뱅이인지 아침에 일어나 치장하는데 일곱 시간을 썼는지 알거예요. 그러나 사람들은 온라인에서도 실생활과 무척 비슷합니다. 온라인에서 비호감은 실생활에서도 아마 비호감일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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