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이클 무어의 영화 ‘자본주의와 사랑 Capitalism: A Love Story‘은 로마와 미국, 제국이 멸망한 징조를 비교하면서 시작한다.
미국 경제의 몰락과 일반대중의 곤경. 자본주의에 대한 물음을 제기한다. “자유민주주의 시장경제”라는 구호에 목을 매는 사람들이 아끼는 미국의 헌법에도 ‘시장’과 ‘자본’은 빠져있다.
주택대출과 금융부실, 남의 불운에 날아드는 사냥꾼들로 그려지는 자본주의의 현장. 목사, 신부, 주교.. 무어가 찾는 사람들은 오늘날의 자본주의를 신봉하지 않는다. 자본주의를 전도하는 예수는 무시무시하다. :p
카터와 레이건의 비교, 선전기계를 통해 정치적 권력을 좌우하기에 이른 자본의 식성은 파괴적이다. 가치를 창출하는 것과 집중하는 것은 다르다. 수십년 동안 중산층의 급료는 크게 변하지 않으면서 부의 극점에 있는 계층의 조세부담은 급하게 줄어들었다. 세수가 줄고 공적인 복지가 기업이 이윤을 추구할 장으로 변했다. 줄어들기만 하는게 아니라 구경도 못하는 파이. 거의 다 가진 소수를 제외한 사람들을 강력한 선전술로 구워삶는데는 한계가 없을까?
노조분쇄와 연금부실, 비행기 조종사와 승무원으로 먹고 살기가 힘들어 음식점에서 일하는 부업까지 필요해졌다. L.A. 공항 활주로 한편에 트레일러를 집으로 삼는 조종사의 삶을 얼마전 신문에서 읽기도 했다. 회사가 수혜자가 되는 생명보험이란 것도 있다. 죽은 농민 Dead Peasants보험. 직원의 죽음이 더 득이 되는 회사란? 실수로 그런 사실을 발견한 유족의 심정은 상상할 수 없다.
로비와 야합, 가려진 협상에서 취하는 그들만의 이득과 중산층의 몰락. 무어는 목소리를 높여 선동하지 않는다. 어처구니 없는 현실의 비극은 설득력을 가진다. 단순한듯 과장된 묘사는 여전하지만 노란 테이프가 펼쳐지는 모습은 후련하기까지 하다.
1937년 메모리얼데이 사건 등 루즈벨트의 일화에서 보는 미국의 과거는 근래와 사뭇 다르다. 밥줄을 끊는 공안주의의 부활은 섬뜩하다. 파산을 구실로 법을 무시하고 임금을 주지 않는데 항의하는 노동자들의 연대나 차압된 집에서 쫓겨난 이웃을 응원하는 데는 복잡한 금융기법이나 경제적 합리화가 필요하지 않다.
오바마의 미국이 보여주는 희망이 전부는 아니다. 그러나 현실적인 차이에도 불구하고 무어가 미국에 던지는 물음은 우리에게도 울리는 바가 있다.
자막보다는 더빙하는게 더 좋을 것 같다.
무어…멍청한 백인들 보고 홀딱반해서 참 좋아하고 존경하는 인물이었는데, 요즘은 실망이 많이 늘어가는 중입니다. 그래도 이번 새작품 보니 반갑네요.
아, 그건 안봤습니다.
풍자는 여전하지만 이번에는 사람들이 생각하는 ‘자본주의’가 정말 자본주의인가, 그런 자본주의가 함께 추구할 가치인가 하는 물음을 던지는 셈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