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뮤얼 아비스먼의 Overcomplicated에는 이해의 한계에 있는 기술 Technology at the Limits of Comprehension이라는 부제가 붙어있다.
옛날 물건들은 간단하고 이해하기 쉽다. 기술이 발전하면서 더 좋고 효율적인 도구들이 등장하고 복잡해졌지만, 시간과 노력을 들이면 완벽하게 이해할 수 있다. 그런 믿음이 어느 순간 사라졌는데, 인터넷을 넘어 스마트폰과 인공지능을 이야기하는 21세기에는 그런 믿음이 오히려 신기하지 않은가.
컴퓨터가 고장나면 예외없이 가족중 한 사람이 원인이다. 손을 대면 망쳐놓을 때가 있고, 어떤때는 그저 있기만 해도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것 같다. 대학에서 아이가 돌아오면 프린터가 멈춘다. 아니면 부모가 방문하니 마우스가 고장난다.
그리고 반대의 문제: 해결책이 나타나자 문제가 신기하게 사라질때. 고장난 기계를 기술지원 부서로 가져가서 담당자가 손을 대자마자 문제는 사라지고 없다. 집에 가져오면 여전히 고장난 기계.
복잡하고 어렵지만 한가지 원인/범인을 찾을 수 있는 경우와 너무 복잡하게 얽혀있어서, 가능한 경우를 나열할 수 있지만 완전히 원인을 찾을 수 없는 경우. 저자는 1986년 우주왕복선 챌린저호의 사고에 대한 파인만 박사의 해석과 도요타 자동차 급발진 사고의 조사를 상반된 예로 제시한다.
추상화 abstraction는 이해와 분석을 돕는 좋은 도구이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내부외부가 얽힌 체계에서는 혼란스러운 인과관계 entanglement가 일어난다. 서로 무관한 부분의 변화가 예상하지 못한 영향을 끼치게 된다. 오래된 프로그램에는 손댈수 없는 부분이 있게 마련이고, 그런 부분을 피해서 기능을 추가하고 문제를 고치려면 우아하지 않은 방법을 쓸수 밖에 없다. 공학이나 법률에서도 마찬가지. 그런 임시방편, 클러지 kluge는 자연에서도 종종 발견할 수 있다.
현장생물학자 field biologist처럼 기술을 대하면 우리는 구축된 세상의 다양한 부분을 찾고 연구하면서 동시에 부분은 연계된 커다란 전체의 아주 작은 부분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인정하게 된다.
자연현상을 단순화하고 통합하려는 물리적 사고와 아직 설명할 수 없는 다양한 발견과 사실도 받아들이고 수집하는 생물학적 사고 (절대적인 분류가 아니라 경향에 대한 비유니까, 예외는 물론 있다). 다재다능 팔방미인, 르네상스맨이 더 이상 없는 까닭은 정보와 지식의 양과 질이 인지능력을 벗어났기 때문이라고. 물리적 사고와 생물학적 사고, 둘 다 결합한 과학적 정신..이 그 다음이지만 완전한 지식이나 이해는 불가능하다.
이해할 수 없는 기술에 감탄하고 믿어야 할까, 두려우니 피해야 할까. 그 사이에서 완전하게 이해할 수 없는 기술을 이용하는데 익숙해지고, 조금씩 더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방식을 이야기하는 책이다. 층 layer이라는 개념이 유용한데, 필요한 정도의 깊이와 범위로 사고하는 방법으로 이어진다 (영화/만화같이 세포, 장기, 생물, 전 생태계로 바뀌는 화면). 방법론보다 비유나 잠언 같지만, 도움이 될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