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명훈의 소설 ‘은닉’의 표지에는 체스 말이 연막에 둘러싸여 있다. 뒤쪽은 체스판 같은 격자무늬.
주인공 ‘나’는 기술자다. 애매한 연방의 조직에서 죽음을 다루는 현장 기술자인 나는 11년 만에 처음으로 받은 휴가를 추운 겨울의 체코에서 보내고 있다. 컨설턴트에서의 조직체계가 연상되는 설정은 근미래 정도의 기술수준에 냉전 첩보물의 향기를 풍긴다. 냉정하고 치밀해야 할 나는 의외의 비공식적 의뢰에 흔들리고 안개 속의 체스판에서 깨어난다.
“왜? 다음 행동을 예측할 수 있어서? 평소 하던 대로 안 움직이면 되지.”
“그러고 싶겠지만 사실 그것도 쉽지는 않아. 우리 같은 사람들이 전화랑 인터넷에서만 자료를 긁어모으는 게 아니니까. 뭐, 그래도 그건 네 말대로 훈련을 좀 하면 개선될 여지가 있는데, 문제는 취향이야. 그건 절대 숨길 수가 없거든.”
“취향?”
“네가 무슨 일을 했는지가 문제가 아니라. 네가 뭘 좋아하는지를 알아낼 수 있다고. 마음이 움직이는 방향을 말이야. 그것도 엄청나게 세밀한 부분까지. 샘플이 많으면 많을수록 더 정확해. 한 십억 명짜리 데이버베이스만 갖고 있으면. 네가 어떤 상황에서 뭘 좋아하게 될지 거의 다 알아낼 수 있어.”
“설마.”
“진짜야. 너는 네 취향이 네 것 같지? 세상이 네 머릿속에 그런 착각을 집어넣은 줄도 모르고. 아무튼 말이야, 투입되는 데이터만 충분하면, 음악 취향이나 옷 고르는 패턴은 물론이고, 어떤 현장요원이 누구를 죽일 때 어떤 칼을 어느 각도로 집어넣는 걸 선호하는지까지 알아낼 수 있어. 너도 예외는 아니야. 무슨 말인지 알겠냐? 행동만 예측하는 게 아니라 존재를 파악할 수 있다고. 네 내면에 대한 심오한 분석 따위는 아예 시도해볼 필요조차 없이 말이야.”
과거와 사연이 있는 요원과 신의 궤도의 주인공 김은경, 그리고 있는듯 없는듯 한 조은수가 등장하는 이야기는 곧 배명훈 특유의 문장과 화법을 탄다. 그러다 보니 혹독한 겨울이나 냉전 분위기가 장식에 불과한 느낌이다. 사적이고 소박한 어조에 변화를 주었다면 어땠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