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민주주의인가 – 최장집 박찬표 박상훈

어떤 민주주의인가 군사독재에 저항하는 운동과 민정을 거쳐 한국사회는 민주화되었다고 한다. 과연 그런가.

민주화에 대한 논쟁을 촉발시키기도 했던 최장집 교수와의 문답식 대담으로 엮은 총론은 읽기 쉽다. 1부에서 그는 절차적인 민주주의에 대한 논리를 정연하게 펼친다. 그리고 박찬표 교수가 법치 對 정치, 전문가정당 對 대중정당 등을 비교한 2부, 박상훈이 ‘정당 없는 민주주의’의 문제와 대안을 구하는 3부로 구성되었다.

최장집은 형식과 내용, 절차적 민주주의와 실질적 민주주의로 구분하는 이해를 경계한다. 보통선거와 투표가 이루어진다고 전부가 아니다. 유권자들이 문제에 대한 의견을 자유롭게 제시하고, 대안으로 제시된 사안에 대해 ‘계몽된 이해’를 가질수 있는가가 자신의 투표가 얼마나 효과적인 것이 되느냐와 직결된다. FTA, 대운하, 미국고기 수입 등을 생각해보면 어떤가?

정치란 갈등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민주적으로 제도화된 틀 안에서 경쟁하고 보통 사람들의 삶의 질을 높이는 결과를 가져오는 집단적 활동이다. 갈등을 외면하고 부정하는 것이 아닌 이런 활동을 통해서 사회 내의 갈등이 해소될 가능성이 높다. 정치를 비효율적인 낭비로 치부하는 행위는 민주주의를 무력하게 만든다. 근래 선거관리위원회나 법원, 헌법재판소의 사례에서 찾아 볼 수 있지 않을까.

미국식 ‘정치 개혁’이 가져온 원내정당, 정책정당, 개방형 국민경선제 등은 오히려 사람들의 정치 참여를 제약하면서 민주주의의 원리와 충돌하는 개혁이 되고 말았다. 지구당 조직과 연설회가 비용과 부패를 이유로 사라졌고, 이제 정부는 인터넷에도 재갈을 물릴 의지를 확실히 보였다.

정당은 사실상 선거 시기에 소집되는 선거인단 조직 이상일 필요도 없고 시민 생활의 일상적 조지자로 기능해야 할 유인도 없다… 이는 사회 명사들 중심의 의회 지배 체제로 퇴행하는 것이 될 것이다. 오로지 수의 다수만을 가진 가난한 대중 개개인이 스스로를 대표하고자 정치에 직접 참여하기를 기대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정치는 경제적으로 여유 있고 정치를 통해 이득을 얻고자 하는 귀족적 투자자들의 일거리 이상이 되지 못할 것이다.

보수와 진보를 자처하는 양쪽에서 공유하는 정치와 정당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은 역설적이다.

지역주의를 문화적 균열이나 지역 간 대립 때문이 아니라, 그를 넘어선 선호와 정책적 요구를 투표를 통해 정치적으로 표출하고 집약할 수 있는 상황을 갖지 못했다는 박상훈의 설명이 흥미롭다. 정당이 다 똑같으면 지역과 연고가 차별화의 수단이 아닌가. 아니면 투표율이 보여주듯 기권.

사회의 균열 구조 위에 위치한 여러 집단의 갈등적 이익과 열정을 정당들이 경쟁적으로 동원하여 지지 기반을 확대하고자 하지 않는 한, 자본주의 시장체제의 분배 구조에서 소외된 약자들의 요구가 국가의 정책 결정에 반영되기는 어렵다… 파당적 편견 없이 객관적 판단을 이끌 전문가에 의존하자는 것은, 본질적으로는 정치 밖에서 상대적으로 좋은 삶의 조건을 향유하고 있어서 민주 정치가 동반하기 마련인 갈등과 쟁투를 두려워하는 상층 계층의 세계관을 반영하는 것이 아닐 수 없다.

운동의 힘은 한국사회에 민주주의를 가져왔지만 정당체제로 이어지지 못했다. ‘정당 없는 민주주의’는 지역주의와 전문가주의, 삼성 공화국까지 낳았다. 도덕주의적 정치관과 운동의 순수성을 고집하다 현실과 멀어지거나 제도권으로 변신하는 일도 잦았다. 사회의 구조적 문제를 개인의 자질과 노력 탓으로 돌리는 것이 현상을 유지하는 방법이다.

가치와 이해가 다르니 점잖기 만 할 수 없다. 언성도 높아지고 시끄러운 것은 어쩌면 당연한지 모른다. 갈등을 무시하고 덮기 보다 그런 과정을 통해 접점을 찾고 타협하여 의견을 모아 대표해 줄 정당이 없다. 기대가 없어 실망도 없는 제도권 말고 사람들의 현실을 담아낼 정당체제는 올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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